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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7) 이모님 5주기

어느새....로 시작하는 어느 가요가 생각난다. 벌써 5년이 지났다. 바로 어제 일인양 생생했던 이모님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는데...
이모님을 위해--솔직하게는 이모님을 내 지인들에게 알리기 위해--만든 이 페이지는 2000년 9월 이모님 생신이었다. 햇수로 22년이 지나가는 시간이 되었다. 내 홈을 찾는 분들은 대부분 읽었을테지만, 어머니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가족으로서 이모님은 명절이나 가족행사에서나 만나는 보통 사람들의 '이모'에 대한 느낌이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다. 5주기를 맞이해 오늘 떠올려본 이모님과 관계된 단어들이다.
라디오, 한복, 기도, 책가방, 만두, 화장실

라디오는 이모님이 우리집에 선물하신 건데, 당시에는 집집마다 스피커를 설치해서 동네전파상에서 수신료를 받고 단일채널의 라디오방송을 듣고 있었는데, 채널을 선택할 수 있는 라디오를 사주신 것이다.
한복은 이모님의 생업이었다. 영도에서는 꽤 유명한 장인이셨기에 손님들이 많았었다.
기도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이모님의 열정적인 기도를 자랑한 기록이 있다.
책가방은 고등학교3년을 등교길엔 아버지가, 하교길엔 이모님이 들어주셨던 기억 때문이다.
만두는 명절때마다 만들었던 손만두. 만두국을 끓이든 군만두를 굽든 명절에 오신 손님들이 다 찬사를 하고 갔던, 만두를 좋아하지 않던 매형 마저 이모님의 만두엔 엄지손을 들었던, 다시 그 맛을 찾을 수 없는 추억의 요리가 아닐까.

그리고 화장실. 나를 잘 아는 지인 외에는 잘 모르지만, 내 인생의 몇 가지 변곡점을 꼽을 때 빠뜨릴 수 없던 사건이다.
다음은 1999년 내 생일에 만든 "진우신문"에 기록한 글이다.
어머니가 안 계셔도 수년 전 이모부와 사별하신 이모님께서 어머니 대신으로 진우 가족을 돌보아 주셨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사신 이모님은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셨지만 집안 일만 하면서도 어깨 넘어 한글을 깨우치신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다. 교회에서는 권사님으로 인정받으시고 많은 교우들이 이모님의 위로와 기도로 힘을 얻는 걸 본다. 이모님이 전도하신 이웃들은 대개 어려운 삶을 이겨내고 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하시며 사신다. 이모님이 안 계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진우는 늘 생각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고1 때 화장실 사건이다. 그 때까지 요강에 용변을 해결했던 진우는 이모님이 오늘부터 화장실을 이용하라는 지시에 무척 화가 났었다. 좌변기도 없는 재래식 화장실에 어떻게 가서 용변을 볼 수 있는가 진우는 걱정하며 몇 일을 버텼다. 그러나 이모님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갔고 밤새 연구한 방법(?)을 몸소 행해 본 결과 드디어 스스로 용변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이 얼마나 큰 일인지는 다른 사람은 모른다. 그러나 진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겐 이 일이 남의 도움 없이 해결할 수 있는 큰 사건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또 다른 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일이었다.

이 글을 쓰는데 한 시간은 더 걸렸다. 코로나19로 강화된 방역수칙에 따라 올해도 Zoom으로 추도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저녁에 가족들과 나눌 말씀은 오늘 특별새벽기도회의 요한복음 2장 13-25절 말씀이다.

(요한복음 2장 / 개역개정)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2021/01/07) 이모님을 그리워하며

오늘은 추도예배를 드리기로 한 날이다. 그런데 작년말부터 강화된 코로나방역지침에 따라 내가 만일 울산 누나네 가정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면 사적모임 5인초과 규정에 걸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Zoom을 이용한 비대면 예배다. 오늘 저녁 7시 30분 프랑스에 있는 동생도 참여하는 가족 비대면예배를 최초로 드리기로 했다.

오늘 아침 일어나 읽은 말씀 로마서 4장이다. 5년째인가 기억도 가물해질 정도로 매일 일어나면 가족과 제자 몇몇에게 하루 한 장 읽은 말씀을 나눈다. 그 말씀 중에서 카톡 한 화면에 잡힐 분량의 구절을 찾아 보낸다. 내가 깨달은 바를 적을 때도 있고 그냥 말씀만(NIV영어 포함) 보낼 때도 있다.

로마서 4장 [개역개정/NIV]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8  Against all hope, Abraham in hope believed and so became the father of many nations, just as it had been said to him, "So shall your offspring be."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아브라함"이라고 소제목을 달 수도 있지만, 특별히 믿음의 선배이시고 평생 기도와 말씀을 함께 하셨던 이모님이 떠올랐던 것은 오늘이 추도일이었을 수도 있겠다. 이모님은 초등학교 문턱도 넘지 못하셨지만 독학으로 한글을 떼시고 성경을 수십번 읽으셨다. 배운 게 없던 어부 베드로가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체득한 선포능력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배운 게 없으셨던 이모님이 성경을 통으로 읽으시며 그것을 기도라는 의사소통수단을 통해 체득하신 것이다. 이 페이지에 소개한 바와 같이 이모님의 기도는 유수와 같다. 장로가 되어 한달에 한번꼴로 대표기도를 하는 나도 중간에 버벅될 때가 있는데 이모님의 기도는 함께 눈을 감고 기도에 참여하는 이가 공감할 만한 용어와 상황을 정리하시며 기도하신다. 그래서 참여한 이들이 함께 울고 감격하는 기도를 하게 한다. 중년의 나이엔 매일 새벽에 깨어 1km 거리에 있는 교회로 걸어가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셨던 수십년의 시간,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일어난 침상에서 혼자 읊조리시며 드렸던 기도의 시간이 이모님의 기도문(한번도 손으로 쓰지 않으셨던)을 만드신 것이다.

이런 이모님을 곁에 두고 배우게 하신 까닭이 우리 가족에게 있다. 오늘 말씀처럼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전쟁과 가난과 남편과 동생이 먼저 죽는 경험을 하시고도 믿음을 떠나지 않으시고, 불쌍한 조카 셋을 자식보다 더 사랑하고 애정을 더하시며 키우신 모습 자체가 믿는 자로서 본을 보여주셨다.

귀가 어두워지셔서 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을 언성을 높이며 말했던 순간이 부끄럽고, 틀니로 고생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느끼지 못하는 틀니문제라 외면했던, 그냥 치과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라고 경시했던 시간이 떠오르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를 위해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시고 집 앞 주차공간 확보래주려고 추운 날에도 몇시간 내가 오기를 기다리셨던 이모님의 그 사랑의 시간들을 어떻게 되갚을 수 있을까? 매일 보던 시간이 줄고 일주일에 몇 차례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았던 철부지 시간을 반성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후회할 일은 하지 말고 그것이 잘못된 일이었으면 바로 수정해서 후회의 간격이 커지지 않도록 하자. 그것이 말씀을 매일의 생활로 실천하셨던 이모님이 우리 가족에게 몸으로 전하신 삶의 본이 아니겠는가.

오늘 우리 가족은 이런 이모님을 기억하며 비대면이지만 함께 하는 마음으로 예배한다. 이모님을 주셨던,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서 먼저 천국에 불러가신 하나님을 떠올리는 예배를 드린다.

 

 

(2020/01/06) 이모님3주기
지난 토요일에 이모님 3주기 추모예배를 부산추모공원 제례실에서 드렸다. 벌써 3년이 흘렀다니..
그날 가족들과 함께 나눈 말씀은 지난 송구영신예배후 뽑은 말씀카드의 내용이었다. 신명기 3장 22절 말씀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한 세 지파에게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하자고 명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이다. 두려움이 없던 시간은 아마 어린 시절 뿐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용감한 이더라도 두려움은 인간에게 늘 닥친다. 전쟁을 앞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지도자의 한 마디는 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
올해 접하게 되는 어떤 도전과 장해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가족임을 이 말씀을 통해 나누고 싶었다.
이모님이 자랑스러워할 모습으로 우리 후손들이 잘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2019/01/04) 부산추모공원
부산추모공원의 개방시간은 11월~2월에는 오후 6시까지다. 공무원의 퇴근시간이 6시니까 5시 30분까지 접수를 받는다. 거의 접수시한 가까이 도착해 제례실 사용신청을 하고 20분간의 주어진 시간 동안 예배를 드렸다. 공교롭게도 작년과 같은 2호실을 주셨네. 작년과 다른 것은 동생이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 그래서 말씀 나눈 후 기도는 동생이 하게 했다. 이모님의 빈자리를 가장 크게 느껴서 1년 가까이 힘들어했던 동생의 고백은 눈물과 함께 이어진다. 난 이날 에스라 9장 9-10절의 말씀을 나누며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유대민족이 성전을 재건축하기 위해 돌아와 보냈던 그 시절의 사건을 상기해봤다.

 9.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10.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하나님이 복주신 유대민족이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기까지 하였으나, 다시 또 주의 계명을 저버렸던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에스라..우리 가족이 이모님이 매일 성경 읽고 매일 기도하던 그 신앙의 모범을 잊지 말자는 다짐을 했다.
동생의 출국날짜가 다음날이어서 평일에 잡게 되어 조카들을 대표해 지난 해 취업한 지현이가 조퇴해서 참여할 수 있었다. 아쉬워하는 나현이의 문자를 읽었다. 사랑하는 조카들이 이렇게 커가는 걸 더 보지 못하신 이모님이 생각났다.

 

 

 

 

 

 

 

(2018/01/06) 부산추모공원에서

작년 이 날 돌아가신 이모님을 추모하기 위해 1년만에 부산추모공원을 찾았다.
봉안당 입구 우측에 마련된 제례실을 이용하기 위해 로비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접수신청하면 전산접수와 동시에 20분의 타이머가 작동된다. 헉..누나네가 5분정도 늦게 오고 있는데...급히 앉아서 전화로 재촉해서 15분 남기고 입장. 기독교식 예배에는 제단에 아무 것도 놓지 않아도 되는데 전 이용자가 피워놓은 향냄새가 빠지지 않은 상태. 찬송가 301장을 함께 부르고, 오늘의 말씀 요한복음 6장 29절을 함께 읽고, 간략히 메시지를 나누고 누나가 대표해서 기도하고, 주기도문으로 추모예배를 마쳤다. 걸린 시간은 10분 정도.
1년전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이모님의 죽음.
그리고 보낸 1년. 찬송가 30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믿음의 가족에게 전하는 말씀은 올해 매일 한 장씩 읽기 시작하기 위해 정한 요한복음. 6일째인지라 아침에 6장을 읽고 거기서 29절 말씀을 정해 늘 하듯이 제자들과 가족에게 카톡 메시지를 남겼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당연히 여기서 밑줄 그은 부분이 가리키는 인물은 주님이시다.
그런데 추모예배를 위해 말씀을 준비하다가 우리네 인생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떠올렸다.
우리 가족에게는 이모님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이가 아니셨는가.
그래서 이미 하나님 품에 안기신 이모님이 보이셨던 믿음의 행위를 생각하자고...

학생회 시절 임원이었던 누나는 대표기도를 참 잘했다.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문장을 만들어 기도를 할 수 있는 건지 감탄하곤 했었다. 그래서 내가 고2때 임원이 되어 대표기도를 할 때 엄청 부담되었다. 누나는 내 나이에는 감히 구사하지 못하는 어휘와 문장을 사용했는데 난 겨우 6줄을 허둥지둥 읊었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누나의 기도를 들었다. 조카들은 언제 누나의 기도를 들어봤을까. 매번 추도예배를 드릴 때마다 집도자인 내가 기도와 말씀을 다 맡았었는데 이젠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추모예배는 돌아가신 분을 떠올리며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추모예배는 기리는 그 분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남은 가족이 드리는 예배다. 예배를 드리며 남은 가족은 다시 믿음을 생각한다. 이모님이 보여주신 믿음의 행위를 기억하고 기도해주셨던 것처럼 사는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2017/10/14) 이모님이 맞으셨을 생일에

오늘(2017/10/14)은 이모님이 살아계셨다면 89번째 생신이 되는 날이다.
1929년생이셨으니...지난 1월 첫 주간에 이모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언젠가는 하나님 나라로 가실 거라는 걸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 날이 그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예상하지 않았었다.
이모님이 먹으라고 해준 반찬을 가지고 가서 먹고 그 빈 통에 이모님이 즐겨드시던 조리퐁을 담아서 방문했던 토요일 아침이 생각난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현관입구에 쓰러져 계셨던 이모님. 이미 사후강직이 일어난지 꽤 된 시간들...난 왜 며칠동안 이모님을 방문하지 않고 지냈던가..그날도 누나네 가정이랑 점심을 먹기 위해 울산으로 향하던 중 전화를 안 받으셔서 확인차 신선동에 들렀었는데...

미리 발견해서 병원으로 이송해 병원에서 소천하셨다면 인간적으로는 덜 미안할 수 있었겠지만 더 힘들었을 나의 상황.

이모님은 돌아가시기 며칠 전 가끔 방문해주시는 복지관 봉사하시는 권사님에게 빨리 죽어야지 하는 소리를 하셨다고 한다. 왜 이리 오래 사는 지 모르겠다고 늘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어서 나이 드신 분들의 인사말처럼 여겼던 기억이 난다.

나의 비명과 다급한 외침에 추운 날씨에 집밖을 나온 동네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너무 좋게 돌아가셨다고 한마디씩 했다. 방금 상을 당한 사람에게 할 소리는 아니지만 오랜 병치레를 하고 가족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어르신들의 고백이기도 했다.

집 바로 건너편에 넉달전에 부임하신 목사님이 사셨기에 도움을 받았다. 목사님도 새로 교회를 맡으시고 처음 맞이하는 장례였는데, 많이 애써주셨다. 이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2017년 첫예배이자 마지막 예배가 된 1월 1일엔 오후예배 없이 온가족예배를 드렸다. 누나네가 오후에 온다고 해 기다리다가 장을 보고 오니 누나와 지현이, 나현이, 서현이까지 다 와 있었다. 방학을 했어도 만나기 힘들었던 조카들인데 그 만남이 없었다면 조카들도 더 슬퍼했을 시간이었던 것 같다.

지나고 나서 보니 그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89번째 생신이었을 오늘이 되어 이 기록을 남긴다.

이모님의 유품 중에 작년 어버이날에 써드린 내 손편지가 있어 간직하고 있다.
이 편지가 마지막 편지가 될 줄은 몰랐다.
이모님 생신이 되면 편지를 또 써드려야지하며 미루었던 후회를 하면서..

 

 

 

 

 

 

 

(2007/02/01)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시는 이모님.
큰 소리로 말해야 알아들으실 만큼 나이도 먹으셨지만
언제나 우리 가족을 위해 애쓰시는 산증인이시다.
건강하시기를 기도한다.
작년에 앨범에서 몇 장을 스캔해두었다. 젊으셨을 적 이모님 모습.

 

 



(2004/11/05)
내일 아침 출근전에 먹고 가라며
늦은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서는 나에게
이모님께서 건네주신
고구마 세 개랑 오늘 일과를 간략히 메모하는 일기장.

 

 

 


(2004/05/01) 장난이 아닐 정도로 미인이었던 이모님...제가 눈이 높은 이유가 따로 있었네요^^

 

 

 

 

 


(2004/03/01)

이모님의 음색은 어머니랑 조금 다르다.
지금도 즐겨부르시는 찬송이 정겹다. 이모님 건강하세요!

 

 

 

 

 


(2003/04/03)
어제는 이모님과 누나집을 방문하기 전에 송정에 가서 점심을 사먹었다. 돈 아깝다고 외식을 꺼려하시는 분이지만 꼭 맛난 음식을 사드리고 싶었다. 해물파전을 맛있게 하는 집이 있다. 한판에 8천원짜리인데 이모님께 설명만 드렸었기 때문에 꼭 맛 뵈드리고 싶었다. 이모님도 맛있게 먹으셨다. 그러면서 집에서 해 먹으면서 8천원짜리라고 하면 기분좋게 먹겠다고 하신다.
이제 우리 나라 나이로 일흔 다섯. 기력이 떨어지시고도 남은 나이인데 아직도 날 수발하시니 미안한 마음 그지 없다.
이모님은 새벽 4시 10분전에 깨신다. 요즘은 교회까지 가서 새벽기도에 참석은 못하시지만 집에서도 꼭 그 시간에 기도하시려고 일어나셔서 기도하신다. 나를 비롯한 가족과 교회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시느라 소요되는 시간이 꽤 길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는 다락방에 올라가 추운 겨울에도 방석하나만 깔고 기도하셨던 이모님은 지금도 기도의 용사다.
기도하는 이모님 덕분에 내가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힘이 난다. 우린 그렇게 관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말이다. 이모님에게서 그걸 또 배운다. 그래서 난 혼자가 아니고 외롭지 않고 행복하다.

 

(2002/12/24)
며칠전 김장을 하신 이모님. 날김치를 좋아하는 난 그 김장김치를 가만 둘 수 없었다^^ 나이가 점점 들어서 아픈 곳이 한 둘이 아니지만 여전히 날 위해 수고해주시는 그 정성을 막을 수가 없다. 사랑을 할 수 있음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란 것을 이모님을 통해 늘 확인하고 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없다.

 

 

 

 

 

 

 

(2000/09/22)

오늘(2000/09/22)은 이모님의 72번째 생신이다. 홀홀 단신 월남하신 아버지는 친척이 이북에 있고 외가도 경기도 여주라 어릴 적부터 우리 가족의 유일한 친척은 이모님 가족이었다. 중요한 가족 행사 때 한번씩 외가에서 친척들이 내려오기도 하셨지만 이웃사촌이 더 가깝다는 말처럼 그분들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모님은 우리가 자라는 것을 항상 지켜보고 사셨고 급기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어린 우리 세 남매를 자식처럼 키우셨으니 우리가 이모님을 생각하는 감정은 어머니와 다를 바 없다.

이모님은 이모부와 사별하신 이후 우리 집에 오셔서 살게 되었는데 이모님은 당시 한복을 만드셔서 영도에서는 꽤 알려진 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모님의 꼼꼼한 솜씨에 반해 맞춤한복을 의뢰하러 왔다. 덕분에 나도 남성 한복의 필수품인 머플러의 양쪽 단을 마무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당시 동네 사람들의 옷수선을 하셨는데 방학 때는 두 분이 재봉틀을 돌리는 것을 배경음악 삼아 지냈던 기억이 난다.(시끄러웠겠죠^^)  

우리가 자랄 때는 TV방송을 저녁시간이후에나 볼 수 있었기에 방학, 특히 겨울방학에는 따뜻한 방 이불 속에서 지낸 시간이 제일 많았다. 보로꾸로 지은 집이라 등이 시릴 정도로 우풍이 심했는데 그 때 이모님이랑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는 지금 그 어느 오락프로그램보다 재미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모님은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셨다. 어릴 때부터 집안 일을 도맡아하셨고 4살 아래인 어머니를 업고서 일하셨다고 한다. (남존여비의 전근대적인 시대를 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지만 이모님께는 그런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모님은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치셨다. 이모님이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면 우린 정말 재미있고 심각하게 들었다. 내가 크면 이모님 얘기를 드라마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이모님의 생애는 정말 드라마틱했다.

이모님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우리 집에 라디오를 사 주신 것이다. 스피커에 의존해 생활했던 우리 집에 주파수를 맞춰서 들을 수 있는 라디오가 생겨서 얼마나 좋았던지...그 라디오에서 밤마다 듣던 "전설따리 삼천리 그 몇 번째 이야기"라고 하던 성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모님은 친자식처럼 우리를 돌보셨다. 어쩜 "나"란 존재가 지금의 "나"가 된 것에 이모님이 함께 한 시간이 상당부분 차지하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나를 애지중지 키우신 어머니는 나의 못된 버릇을 다 받아주셨지만 이모님은 나의 잘못된 습관을 용납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난 도약할 수 있었다. 자식을 키울 때 모든 것을 다 받아주면 자식의 성장이 더디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모님이 나를 그렇게 키우신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른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란 말이 있다. 이성적인 두뇌와 감성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말인데 자식을 키움에 있어서도 이 양자의 조화는 모든 부모들의 숙제가 아닐까 싶다. 막상 자식을 낳고 기르는 주위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조화를 이루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든게 사실 아닌가.

이모님은 만두를 참 잘 만드신다. 명절마다 인사차 오는 외가 친척들이 지난 추석에도 온 가족이 오는 차 안에서 그랬단다. 맛있는 만두 먹을 수 있겠구나.....아니 추석에 무슨 만두를 한다고^^하지만 나도 내년 설날 먹을 만두국을 생각하며 군침이 돈다^^....이모님은 또한 기도의 용사다. 이모님이 기도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은 이모님이 초등학교도 못 나왔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무식한 어부였던 베드로가 예수님과 3년 함께 하더니 허다한 율법사들을 부끄럽게 하는 명설교를 했던 사도행전의 역사는 지금 우리 이모한테서도 느낄 수 있다. 이모님의 기도에 위로를 받는 이들이 많고 이모님이 전도한 이웃들은 다들 변화되어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모님은 누나가 낳은 쌍둥이 중 동생인 나현이를 4년가까이 키우셨다. 다시 또 애를 맡아 키우시지는 않겠다고 하시지만---내 아이는 어쩌지???^^---그 시간이 힘들었음에도 행복한 시간이었음을 나는 안다. 애를 낳으면 4살 정도까지는 남이 키워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한(^^) 나지만 그 시간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시간임을 곁에서 볼 수 있었다.

주는 사랑. 그것은 우리 이모님이 보여주신 사랑이다. 세상이 주는 표창과 인정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 나와 우리 가족은 그런 사랑에 빚을 졌다. 되갚을 수 없는 그 사랑에....

이모님! 건강하세요. 사랑해요.

>>>>>>>>>>>>>>>>아...참 이모님은 언젠가 내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며 성경구절을 소개해주셨다.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언 19:14)" 이모님의 소망대로 아마 내게 필요한 "슬기로운 아내"가 어딘가에 살아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