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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2)
토요일이자 벚꽃이 화창한 봄날. 그래도 이 날은 16년전 돌아가신 아버지 추도일.
프랑스 세잔에 머물고 있는 동생, 분당에 직장 다니는 조카랑 3원 Zoom 예배로 드리기로 하고 시간을 맞췄다. 영천호국원을 다녀오고 밥 먹는 시간 빼니 오후 세시가 적당했다. 어제 준비해 미리 배포한 예배순서지. 순서지 없이 해오다가 갑자기 성경책, 찬송가를 들고가지 않을 거라 이렇게 준비했다. 한 페이지로 다 볼 수 있게. 노트북으로 Zoom화면을 통해 참여하면서도 화면 한 쪽에 띄울 수 있어서 편할 것 같았다.

오늘 준비한 말씀은 사순절 묵상집 내일자 본문이다. 작가는 시편 126편 3절을 떠올렸지만, 난 시편 126편을 본문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35년전 쯤 기숙사 내 책상에 써두었던 구절이 있어서다.

시편 126편 1~6절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1년에 한번만 치르는 CPA자격시험을 준비하며 열공하던 시절. 다른 것을 포기하고 거기에 매진하며 뿌린 시간과 노력은 내 책상 전면에 써둔 이 말씀으로 보상을 받았다. 아직 남은 인생이 장장한 조카들에게 먼저 산 사람으로 나누어주고 싶었던 말씀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일자 사순절 묵상집 본문엔 '아버지'를 떠올리는 시가 적혀 있었다. 비석에 이름이 적힌 호국원에 일년에 한번 찾아가는 이유는 거기에 아버지의 뼈가 묻혀 있어서가 아니다. 집에서 2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운전해 굳이 비석 옆에 놓인 조화를 바꾸 갈면서 옆 묘비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비교당하지 않게 하려는 인간적인 이유에서 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행위를 통해 아버지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기억을 되살릴 뿐이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니 시인의 마음이 느껴졌다. 살아계셨을 때 좀더 가깝게 지낼 걸. 잔소리로 들렸던 아버지의 음성을 현대기술을 차용해 녹음, 녹화해두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게 하는 시간이었다.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나눌 때 이 표현을 했다.
그런 아쉬움이 가족들에게 전달되는 시간이었다. 이젠 눈물이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이 시를 읊으며 울먹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억을 남기며 40분 Zoom시간에 맞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며 예배를 드렸다.

아버지,
보이지만 가지 못하는 고향이 그리워
고향이 보이는 그 곳으로 찾아갑니다.

아버지,
아는 이 아무도 없는 의로운 그곳으로
이제는 제가 아버지를 뵈러 갑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계산 그 곳이
제 고향이요, 쉼과 회복의 장소입니다.

아버지,
고향을 떠난 포로생활이 고달파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이 그립습니다.

아버지,
흘린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주님을
상처받았던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키실 주님을
기대하며 찬양합니다.
 

 

(2021/04/02)
오늘은 성금요일 (Good Friday) 이자 아버지추도일이다.
5인이상 가족모임도 금지인 상태라 이번에도 가족들은 각자 거처에서 Zoom으로 저녁에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부산은 확진자수 증가에 따라 오늘부터 2단계로 격상한 거리두기지침을 발표했다. 작년 오늘의 기록에도 언급된  코로나상황이 여전히 이어지는 오늘의 현실. 마스크 쓰지 않고 답답함 없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일상의 회복은 언제 가능할까?

성금요일에 읽은 사순절 묵상집 내용은 너무 잘 아는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But he was pierc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crushed for our iniquities; the punishment that brought us peace was upon him, and by his wounds we are healed.

나를 대신해 누군가가 싸워주고 누군가가 희생을 하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어린 시절 가정과 학교에서 솔선수범하여 희생을 보여준 부모님, 형제자매, 선생님, 동료나 선후배가 있었기에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다. 소시오패스가 만연한 현대사회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제대로 인성을 교육받지 못한 실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좋은 사람"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의도하지 않게 피해를 입혔다면 정중한 사과를 하는 사람이어야 기본이 아닐까? 선친께서 모든 면에서 본받을 만한 좋은 사람이었다고 평가를 내린다면 일촌관계의 자식이라는 전제를 깔지 않으면 인정받기 어려운 평가일 것이다. 누구나 허물이 있고 특정인에게는 안 좋은 부분을 기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식인 내게는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한 아버지로 기억한다.

우리 삼남매의 이름에 붙여준 "진(眞)"이란 단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한자를 배우기 전에도 아버지는 직접 붓으로 한자를 쓰시며 알려주셨고 '참 진'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으니 말이다. 거짓과 위선이 판치는 세상에서 "참"되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릴 땐 반복적인 설교나 잔소리로 들렸지만 어느새 내게도 가장 소중한 단어가 되었다. 교회를 다니며 늘 들은 말씀은 사랑이다. 교회는 선한 행위를 해야 하고 교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목사님이 매주 말씀하시는 설교의 주내용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같지 않다. 들킨 죄인은 교도소에 있고 들키지 않은 죄인은 교회에 있다고 우스개소리로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실제로도 들키지 않은 죄인들이 모인 교회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곳이기도 하다. 정직하게 살라는 학교의 교육이 십계명에 언급되었던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교회의 교육과 다르지 않아도 사기꾼이 득실되는 세상이 바뀌지 않은 것처럼, 교회내에서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거짓말을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이 글에서 교회론을 쓰려는 건 아니다. 진실되게 살라고 가르치신 아버지의 뜻은 거짓증거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플 뿐이다. 수십년전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댈 만한 거짓말을 한 사실이 내 머리 기억속에도 존재한다. 예쁘지 않은데도 예쁘다고 하는 소위 하얀 거짓말은 속이려는 의도가 있지 않기에 기억에 남을 일은 아니지만 나의 필요나 내가 속한 조직을 위해서 해야 했던 거짓말한 행위는 수십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성격적으로  예민한 사람은 그 죄책감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하지 않아야 하는 짓을 했다는 죄책감이 주는 압박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난 기억은 하되 죄책감에서 해방된 자유인이라 그럴 리는 없지만 말이다.

아버지 추도일을 맞이해 실력과 성공이란 사회적 평가에 눌려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진실'의 소중함을 새삼 떠올려보는 아침이다.

 

(2020/04/02)
새벽에 펼친 오늘의 말씀은 요한복음 2장이다.
요한복음 2장은 가나의 혼인잔치 이적을 서술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성전청소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추도일에 이 말씀을 읽으며 '아버지'와 '교회'를 생각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한복음 2장 13-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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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죄가 없으신 분으로 배워왔는데 직접 성경을 읽기 시작했을 때 사춘기의 반항처럼 난 이 부분을 의문시했었다. 어떻게 죄없으신 성자 예수님이 세상 어디서도 범죄시하는 저런 폭력적인 행동을 하셨을까? 그런 무질서한 행동을 하는 걸 기독교는 용인하는 걸까?..지금도 이런 식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일 친구들이 분명 있다. 그러나 성경이 이 사실을 복음서에 적나라하게 기록한 까닭은 그 행위의 목적과 의도가 보여지는 폭력성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교의 전통상 성전에서 번제에 사용될 양이나 비둘기 등을 매매하고 환전하는 것은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당연시되었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지어진 거룩한 성전은 세월과 함께 본말이 전도되어 세상의 맘몬신 '돈'을 추구하는 시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의 목적을 환기시키셨던 것이고, 기독교에서의 교회는 보이는 형태의 예배당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의 모임을 의미하게 되었다.

세상을 뒤엎은 전염병의 존재는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 그것을 역사서가 아닌 현실에서 동시대적으로 만나는 것은 2020년이 처음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아무 문제의식 없이 지냈던 "일상"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교회도 한달 넘게 그동안과는 다른 형태의 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형식 대신 온라인 매체를 통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이것을 정상적이라고 또 계속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 안녕을 책임지는 정부와 사회의 요청을 외면하는 교회는 교회일 수 없기에 일부 이견을 가진 소수 외에는 정부의 지침에 순응하고 있다. 전쟁중에도 예배가 끊어지지 않은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어른들이 존재하는 교회. 그러나 교회는 그런 전통보다 사회공동체의 안녕을 먼저 생각하는 교회여야 한다. 교회는 예배당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사람들이고, 설교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상향 속의 교회가 아닌 아파하는 사람들을 다독여주고 품어주는 자들이야 말로 진정한 예배자들이고 그런 예배자들이 모이는 모임이 교회임을 상기해야 한다.

아버지는 가끔씩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비판의식을 보이셨다. 급기야 언젠가는 세상을 향해 뒤집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하시기도 하셨다. 소시민에 불과한 사람이 그런 의식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긴 해도, 군사독재시절 거리에서 아무나 잡아가고, 12시만 되면 국민의 이동이 제한되는 통행금지조치가 일상이었던 그 시절 그런 한탄마저 하지 않고서 어떻게 정상적으로 살 수 있었겠는가?

성전청소에 나선 예수님의 행위에서 돌아가신 선친을 떠올렸던 오늘의 단상이었다.

 

 

 

 

(2019/04/02)
오늘은 아버지추도일. 지난 토요일 누나네랑 같이 영천 호국원을 다녀오긴 했으니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 울산으로 왔다. 고등학생 막내 서현이랑 퇴근해 돌아온 첫째 지현이, 그리고 누나랑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제사와 다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지만 살아 존재하는 우리 가족들이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를 객관화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족을 위해 기도를 하는 멘트 속에서도 우린 그것을 확인한다. 아버지, 어머니로 인해 이어지는 신앙이 함께 예배드리는 조카들에게도 전달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같이.

오늘 선택한 말씀은 마태복음 15장 1-11절. 추도예배와 어울리는 말씀은 아니지만 이걸 선택했다. 고르반이란 유대의 율법적 행위를 지적하신 예수님의 진의를 우리 가족들이 다시 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2018/04/02)

시간이 빠르다는 것은 매년 아버지추도일에 올리는 글이 어느새 12년이나 흘렀다는 점을 확인함에서 알 수 있다. 오늘이 평일이라 어제 오후 예배를 마치고 울산으로 이동했다. 누나네 가족과 함께 추도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다.
서현이가 읽도록 한 말씀은 요나 4장이다. 4장분량의 짧은 성경이고 어려운 해석이 필요없는 예언서이기에 크리스천이라면 잘 아는 내용이지만(이 말에 찔리는 사람은 바로 4분투자해서 읽어보기^^), 서현이는 잘 모르는 것 같아 앞부분 해설을 해주었다. 사실 난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성경을 의무감에서가 아닌 자발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그런데 지난 주간 치른 장로고시--장로가 되려면 교회에서 2/3이상의 투표를 얻는 것 말고도 교회의 상회격인 노회 주관 시험에 응시해야 한다--를 치르면서 너무 잘 아는 성경구절을 써내지 못하는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아...암기의 대가였는데..흑흑흑^^

4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But Jonah was greatly displeased and became angry.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가 화를 내는 이유는 바로 3장 말미에 있다.
"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죄악의 도시 니느웨가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게 되었는데, 요나는 오히려 역정을 내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이 도시가 망하는 것을 보겠다고 성밖에서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 이어진다.

요나의 이러한 교만한 모습은 오래된 신앙인에게서 자주 목격된다. 바로 나도 그랬다는 생각에서 이 말씀을 아버지 추도예배 본문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우리 가족들에게도 함께 경각심을 가지자고....

늘 밝히지만 '아버지 추도예배'로 검색어를 쳐서 이 페이지를 방문하는 이들이 있다. 추도예배 때 어떤 말씀을 나누어야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인물을 생각하고 예배하는 경우는 없다. 예배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한다. 그러나 모인 무리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추도식을 예배로 대신하는 기독교의 경우에도 가끔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예배의 중심에 돌아가신 분을 모시는 듯한 착각에서다.
예배를 통해 크리스천들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공동체를 인식할 뿐이다.
그리고 선친이 남긴 후손으로서 마땅히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확인하고 다짐한다.

 

 

 

(2017/04/02)

올해 초 이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혼자 남은 나 혼자 예배 드릴 수는 없어서, 주일 예배 후 울산으로 향했다. 누나네 가족과 함께 아버지 추도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다. 프랑스에 있는 동생과도 페이스타임 영상통화를 했다.
그리고 빙 둘러 앉아 예배를 드렸다.
오늘 선택한 본문은 내가 언제든 어느 상황에서든 꺼낼 수 있는 말씀.
누가복음 15장 11-32절 말씀이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
예수님이 하신 여러 비유 중에 가장 유명한 스토리가 아닐까?
그리고 그 중심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아버지와 탕자, 그리고 맏아들.
지금도 세상 사람들에게 이 스토리를 전하면 아마 모두 동의하지 않을 스토리다.
못된 탕자가 아무 일 없었듯이 대접을 받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공평하다고 느낄 거라는...
막내 조카가 한 절을 읽고 나머지 식구들이 다음 구절을 함께 읽으면 다시 막내가 읽는 식의 교독을 했다. 앞으로도 여러번의 기회에 이 본문의 설교를 듣게 될테지만, 삼촌이 느꼈던 이 말씀의 의미를 공감하게 하고 싶었다.
그것은 이해 못할 스토리 속에서 내가 탕자로 감정이입하는 순간에 해결되는 어메이징한 이야기라는 것을...

추도예배를 드리며 누나와 나 그리고 동생을 낳고 기르신 어머니, 아버지, 이모님이 돌아가시고 우리가 앞으로의 세대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나를 백업해줄 분이 없다는 중차대한 사실. 조카들과 앞으로 나올 후손들에게 그 몫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사실.

감사했다. 그런 의미를 함께 공유할 가족이 있다는 것에. 그리고 매일 기도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래서 추도예배는 기다려지는 날이 될 것이다.
아버지...잘 하고 있는 것 맞지요?

 

 

 

 

 

(2016/04/02)

10년전 일기에 기록된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과 이후 장례식까지의 스토리를 읽으며,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다. 그게 좀 빠르냐 늦느냐일 뿐.
가족을 잃을 때의 슬픔은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의 아쉬운 감정으로는 설명 못할 일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또한 성장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지게 되니 말이다.

모처럼 누나네 가족들과 함께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영천 호국원을 방문하기로 했고, 예배를 인도해야 하는 내가 함께 나눌 말씀을 골라야 해 새벽에 깨어 매일 읽고 제자들에게 전달하는 본문 말씀 중에서 골랐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편77편1절)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을 위로하는 제사가 아니다.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며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예배다.

나의 벗들에게도 가족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한다.

 

 

 

(2015/04/02)
작년말부터 다시 일어나고 있는 아버지 신드롬. 천만관객을 넘긴 영화 "국제시장" 탓이기도 하지만 아버지 시대에 대한 향수로 겨우겨우 정권을 이어가는 현 정부의 의도도 한 몫하고 있지 않나 싶다.
하지만 꼭 이런 삐딱한 시각이 아니더라도 아버지는 시대와 공간을 불변하고 세상 모든 가정에서 사랑과 증오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연로하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기도 하고 사고로 어릴 때부터 어머니 슬하에서 세상을 배우고 자란 이들도 있고, 가끔씩 뉴스에서 보듯 천륜을 거역하는 잘못을 보기도 하고...
그래서 아버지는 모든 수필의 주제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시절에 '아버지'란 제목으로 글 한번 써보지 않은 이들이 있을까...
오늘은 9년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추도일.
매년 몇 자라도 적었던 그 날의 흔적이 작년에는 없어서 마구 찾았다. 난 작년 4월2일에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가 하고..
카카오스토리에서 그날 휠체어를 타고 해운대센텀지역을 누비고 민락동수변공원까지 몇시간동안 다녔던 기록이 있었다.
기억이 난다. 그렇게 힘들이고 나서 씻고 신선동에 와서 예배를 드렸던..
그러고 나니 아무 기록도 따로 남기지 않았나보다.
겨우 8년만에 그랬었나...하는 반성을 1년이 지나서 했다.
그런데 어제 새벽 10년전 다섯편의 일기를 올리면서 생각이 났다. 내가 잘못했던 일들을...
후회란 항상 지나고 나서 생기는 현상이다.
돌이킬 수 없는데...그럴 수 없으니까 되돌리고 싶은 기억의 흔적...
이제 그런 허황된 꿈을 꾸는 나이는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생각이 나서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망각을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늘 과거에 얽매여 전진하지 못할텐데 말이다...오늘은 그런 날로 기억하련다. 
아버지...저 잘 살고 있나요? 아버지가 못하신 것, 못 보신 것,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보는 것으로 아버지가 미련을 두신 일을 대신해주는  당신의 분신이 아닌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또 하나의 인격이 제대로 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지켜보시리라 믿습니다.

 

 

(2014/04/02)
오늘(4/2)은 아버지 추도일. 어느새 8년이 흘렀구나.
아버지 아들답게 성실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새삼 다짐해본다. 이 아침에.


(2013/04/02) 7주기

오늘은 7년전 돌아가신 아버지 추도일
아침 식사후에 간단한 추도예배를 드리기로 했는데
오늘은 어떤 말씀을 선택할 지 어젯밤 고민했다.
그러다가 만약 오늘 돌아가실 분이 옆에 있다면
성경 66권중 어떤 말씀을 전할 것인가란 질문을 스스로 해보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씀이어야 할 듯 싶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선택해서 말씀을 나누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음으로 기뻐하니
...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전서 1장 8,9절)
오늘 이 구절이 의미가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2012/04/02) 아버지 6주기 추도일
오늘(4/2)은 아버지추도일이다.
저녁시간에 이모님과 둘이서 예배를 드렸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예배중에 가족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동안의 변화를 확인한다.
아버지는 세상에 안 계시지만 남겨진 후손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가 못 이루신 일을 해나가는 것도 남은 자의 몫이기도 하다.
오늘 문득 불효자였던 나를 다시 돌아본다. 아버지의 성격을 닮은 나는 아버지 맘에 들었을까?
마냥 돌봐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셨다가 내가 스스로 자립하는 모습을 보시며 그래도 만족하지는 않으셨을까?
아버지에게 손주 안겨드리지 못한 점이 일생의 불효가 된 듯하다. 나이가 들어서 철이 든다.
좀 더 빨리 들었더라면..하는 맘은 역시 후회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고난 주간 새벽기도회 첫날. 오늘 들었던 말씀을 가지고 추도예배시간에 이모님께 들려드렸다.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의미를 이 추도일에 기억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아직도 가끔씩 추도예배 본문을 찾아 검색엔진에서 내 홈을 방문하는 이들이 있다.
오늘 느낀 말씀 그것을 나누면 된다. 추도예배의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니 말이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우리 가족에게 남긴 의미를.
오늘도 그런 기도를 드렸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가정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베풀고 위해서 기도해주는 그런 우리 가정이 되기를...

 

 

 

 

 

 

 

(2011/04/02) 아버지 5주기 추도예배
오늘은 울산에서 누나와 서현이랑 추도예배를 드렸다. 3학년이 된 조카가 오늘 본문을 읽었다. 조카가 어려워하지 않을 본문을 선택했는데 고린도전서 13장이다. 조카는 또박또박 읽었다. 잘 읽어줬는데 완벽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시무룩해졌다. 요 조그만 놈이 벌써 성경 본문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단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누나와 같이 예배를 드려본 지도 꽤 되었다. 항상 우리 집에서 이모님과 드렸는데 이번엔 당일에 영천을 다녀오게 되었고  직계후손인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되어 미처 준비하지 못한 누나를 당황하게 하면서도 강행했다.
기도를 하는데 우리 가족들을 떠올리며 중보하다보니 눈물이 난다. 하나님은 우리 가족들이 떨어져 있어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무기를 주셨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며 이 날을 기억한다.

 

 

 

 

 

 

(2010/04/02) 아버지 4주기 추도예배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린도후서 13장 5절)

오늘은 4년전 아침 이 땅을 떠나신 나의 영원한 참벗 아버지의 추도일이다.
저녁을 먹고 7시에 이모님과 동생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가끔씩 무작위로 내 홈을 찾는 이들이 검색엔진에서 찾는 검색어는 "아버지추도예배성경구절"이다.
이 페이지--메인페이지에 며칠 남지만 곧 본 자리인 4U페이지로 옮기기에--를 찾아 온 사람들 중에는 아버지 추도예배에 맞는 성경말씀을 찾고자 오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주제별로 요약 정리된 성경말씀이 어딘가에 있을텐데 이 초라한 페이지에서도 뭔가 찾아볼 만한 게 있는지 모르겠다.
일년에 두 번 추도예배를 드리며 나눌 말씀은 내가 정한다.
나는 설교자가 아니기에 주제별로 정리된 말씀이 내 머리 속에는 없다.
다만 우리 가족이 드리는 예배니까 내가 감동했고 생각을 많이 했던 말씀 중에서 선택한다.

이 말씀은 십수년전 생명의 삶 QT를 하다가 읽었던 조지휫필드 목사의 마지막 설교 본문이었다.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하시고 자리에 누우신채 하늘 나라로 가신 목사님의 유언의 말씀이었단 증언에 이 본문이 내 뇌리에 남았다.
그리고 내 골수를 찌르는 말씀이 되었다.
예수쟁이이면서도 예수쟁이답지 않은 삶을 살곤 하는 게 이 땅에서 크리스챤들의 고민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경고의 말씀이 된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나의 잘못은 내가 알고 그리고 또한 주님도 아신다.
그러니 내 안에 그가 계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아버지는 이 땅에 계시지 않으시지만 이 날 추도예배를 드리며 나와 우리 가정을 돌아본다.
아버지가 남긴 세 남매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우리들에게는 의미있는 행위가 된다.
그리고 이 날 예배를 드림으로 이 땅에서의 의미있는 삶을 다시 다짐하고 재정비한다.
내일은 모처럼 아버지 유골을 묻은 영천에 간다. 호국원 가는 길이 떠오른다. 내일 날씨는 좋을 것 같다.

 

 

(2009/04/02) 아버지 3주기 추도일인데...
심한 감기를 앓고 있다.
아침에 간신히 일어나 약도 못 먹고 운전을 해야 했다. 강의 약속을 빼먹을 수는 없어서..
간신히 수업을 했다. 세시간인데 두시간만 채웠다. 체력이 못 받혀준다.
양해를 구하고 숙소로 왔다. 점심을 사먹고 약을 먹고 누웠다. 조금 자니 조금은 낫다.
그래서 이 글을 쓸 수도 있다.
저녁 강의를 마치면 부산 돌아가 며칠 푹 쉬어야겠다.
오늘은 아버지의 3주기날인데...아침에 예배를 못 드렸다. 저녁 늦게 귀가하면 이모님과 함께 예배를 드릴 것이다.
어느새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는지...
건강하자. 건강하자.

 

 

 

 

 

(2008/04/02)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장 6절

오늘은 나의 벗이셨던 아버지의 추도일이다.
아침 일찍 씻고 이 말씀을 나누며 잠깐 예배를 드렸다.
2년전 병실에서 최후를 맞으신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날 밤 괴로와하시던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힘들었던 기억까지도.
크리스챤으로 산다는 것은 다르게 산다는 선언이다.
돌아가신 조상께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효를 행하지 않는 종교라고 다수의 무지한 비크리스챤은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기독교인이다.
추도예배의 중심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것이 다를 뿐이다.
다소 생뚱 맞을 수 있는 이 말씀이 추도예배의 본문이 될 수 있는 것도 그와 같다.
아버지가 뿌린 씨앗들이 자라 사회의 일원이 되어 산다.
그러나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태어나게 하신 까닭이 아닐 수 업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다시 이 땅에 태어난 까닭을 상기하는 것.
그것이 크리스챤이 추도일을 지키는 이유다.

 

 

 



(2007/04/02)
1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가다니...
주일 저녁 우리 가족 모두가 모였다.
2일이 아버지 1주기이지만 울산에 있는 누나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이 날이어서 하루 당겨 추도예배를 드렸다.
예배는 정말 잠깐이다. 찬송가 한 곡 부르고 성경구절 찾아 읽고
1년을 돌아보며 나의 감회를 얘기하고 우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한 후 주기도문으로 마치는...
막내 조카 서현이가 그 시간 동안 조용히 침묵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감정에 몰입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내 눈가의 이슬을 닦아주더니
예배를 마치고 그런다.
"삼촌, 왜 울었어?"
"음...너도 조금만 크면 알게 돼. 그지 지현아, 나현아?"
고개를 끄덕이는 중3 조카 지현이와 나현이.
어머니 추도예배를 함께 드린 지도 꽤 오래 되었었는데
아버지 추도예배를 온 가족이 함께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늘 말하지만, 제사를 지내는 유교적 전통의 보통 사람들과 달리 기독교인은 추도예배를 드린다.
예배는 죽은 사람을 기리는 제사와 달리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의 시간이다.
예배를 드리며 남겨진 우리 가족이 먼저 가신 부모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지 다시 정돈한다.
그분들이 못다한 이생에서의 삶을 피를 나눈 후손들이 이루어가는 것.
그것이 대를 이어온 가족이란 끈의 한 의미라고 볼 때
1년에 한 차례 가족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음식을 나누며 의미를 찾는 것이다.
모처럼 막내 조카의 설침으로 좁은 방에 더덕더덕 모여 보낸 시간이 떠들썩했다.
누나 가족이 떠난 빈 자리가 너무 조용할 만큼..
사진의 아버지는 직장 동료들과 퇴근 후 술잔을 기울이시던 모습이시다.
늙으시기전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주위에서 늘상 보는 평범한 소시민의 한 사람이다.
작년에 장례식 때 노트북슬라이드쇼를 계획했다가 준비할 새도 없이 떠나셔서 하지 못한
아버지 앨범의 사진을 스캔했었다.
그리고 오늘 추도예배전에 슬라이드쇼를 했다.
많지 않은 사진 중에 난 이 모습이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주던 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아버지가 원하셨던 술친구로서 참벗이 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명명해주신 "참벗"의 의미는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계속 지속될 것이다.
아버지...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2006/05/27)
아버지 유골이 묻힌 호국원에 묘비가 완성되었다는 뉴스를 홈페이지에서 읽고 학생들 "놀토"인 지난 주말 비 내리는 가운데 찾았다.
아버지를 보러 간다는 말은 크리스찬으로서는 어불성설이다. 간단히 기도하고 올 것을 알면서도 가보고 싶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조화가 곁에 놓여 있다. 새로 사 가지고 간 조화도 참 잘 어울린다.
가벼운 마음으로 드라이브하고 갈 만한 코스. 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겠는가.


 

 

 

(2006/04/04) 25년만에 맞이한 장례식
어머니를 소개하던 99년 그 날에 난 그런 기억을 떠올렸었다. 장례식 때보다 비어 있는 어머니의 자리를 느꼈을 때 울음을 터뜨렸다고. 오늘 어머니를 떠나보냈던 당감동 화장터 대신에 부산 영락공원에서 두 번째 화장을 경험하였다. 좀더 현대식으로 축조되어 운구되어 온 관이 엘리베이터 문처럼 열린 곳에 들어가는 장면을 CCTV를 통해 대기실에서 쳐다보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 옛날에는 화로로 들어가는 관을 그대로 목격해야 했었는데...
아침 8시 14구의 시신이 동시 연소되는 가운데 매번 자기 차례의 관이 들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오열하는 상주와 가족들을 목격하는 것은 그곳에서는 일상다반사가 되어 있었다. 나 대신 영정사진을 들 수 없어 대신 든 조카와 누나 매형 동생, 그리고 교회식구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그들과 다르지 않은 장면을 연출했다.
25년전에 난 다시는 이런 화장행위를 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 속으로 울분을 삭이며 내뱉었었다. 당시 5학년이던 동생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다더라. 그러나 아버지는 한 줌의 재로 변한 어머니의 유골을 손장갑도 끼지 않으신 채 뿌리시며 그러셨다. 자신도 이렇게 화장할 것이라고...
나이가 들며 난 아버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기 전 매장을 하면 다리가 불편한 내가 매번 무덤을 찾는 고생길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셨던 당신의 뜻을 이해하였듯이 당연히 아버지도 그렇게 하시려는 뜻에 동의했다.
2002년 김대중정부는 월남파병 유공자만큼은 아니지만 6.25참전 군인들에게도 "참전용사"라는 칭호를 붙여 약간의 혜택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2000년,2001년 연거푸 넘어지셔서 병원에서 추석명절을 보내야 했던 아버지가 드디어 추석을 무사히 넘기신 후 다시 넘어지셔서 엊그제 돌아가시기 전까지 병원생활을 시작하던 그해 추석 며칠 전에 아버지를 대신해 중앙동 국가보훈처에 참전용사증을 받으러 갔었는데, 그것이 기회가 되어 아버지를 국립묘지로 승격한 경북 영천 호국원에 안장할 수 있게 되었다. 비가 주룩주룩 흐르는 이 날. 화장장에서 분쇄된 유골을 함에 넣어 거기까지 가서 안치하고 돌아왔다. 아버지가 원하시던 대로 조국산하에 뿌려지는 것은 불법행위가 된 시대에 법원칙에 충실하셨던 아버지의 뜻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허례허식 없이---아무 비용이 들지 않음---아름다운 산하가 내려다 보이는 그곳에 안장하였다. 비록 육신은 아무 것도 아니요 그 전망을 바라다보고 "아름답다"란 표현을 붙인 것이 나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아는 나로서도 그리 불편하지 않은 장례식이었다.

주일 아침 급박히 전화를 받았다. 간호사는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니 가족들이 빨리 와 달라고 했다. 어젯밤에도 2시간동안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다가 진통제를 맞으시고 약간 진정하는 것을 보고 귀가했었다. 바쁜 시즌을 끝낼 때까지 그리고 동생이 귀국할 때까지 견뎌주시던 아버지. 열흘 후의 생신(4/10)까지는 시간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동생은 아버지의 사진을 정리해서 장례를 미리 준비하자고 했었다. 보통의 장례식과는 달리 조문 오시는 분들께 아버지가 이렇게 살다 가신 분이란 것을 잠깐이라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참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었다. 그 정도의 시간은 있으리라고 믿었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누나를 호출했고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순간 다시 벨이 울렸다. 방금 운명하셨습니다....예?...후다닥 병원을 찾았을 때는 여타의 드라마에서 보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바이탈을 체크하는 기기들이 아버지 가슴 여기 저기에 꽂혀 있었고, 40분전에 뛰던 맥박이 다시 뛸 것처럼 아버지의 손은 따뜻했었다. 이제 숨이 나오지 않은 코와 입. 감겨 있는 두 눈....아침에 평소와 마찬가지의 모습이어서 그렇게 급하게 운명하실 줄은 몰랐다고 간호사는 말한다. 호흡이 가빠져 조치를 취하던 중 조용이 운명하셨다고 한다. 아버지...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며칠전인데도 생생하지 못하고 왔다갔다하는 일들이 숨가쁘게 지나갔다. 여러 사람들이 다녀갔고 위로의 말을 전했고 조문객을 맞이하느라 다리는 저려오고 아픈 것을 참아가던 시간이 어느새 다 끝나고 집에 돌아와 며칠만에 노트북을 펼쳤다. 휴~

아버지의 투병생활 3년 반. 이미 홀로 사는 데 익숙해졌고 이제 전과 같이 쳐다보고 눈시울 적실 빈자리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쩜 나를 꽉 잡고 있던 무언가에서 벗어나 펄펄 날아 버리기라도 할 지 모르겠다. 예전처럼 혼자 눈물 훌쩍이거나 괴로워할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마감일을 넘길 경우 당하게 될 나의 처지를 위해주시고 사랑하는 막내딸을 기다려주셨던 아버지는 끝까지 나에게 선물을 주신 셈이다. 내가 방종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도록 하는 방어판으로서 지난 수년간 자리하셨던 아버지의 뜻을 눈물을 꾹 참고 펼쳐드리는 나의 남은 인생이 될 것을 약속하며 정리되지 않은 장례식 날의 사념을 끄적여 본다.

감사합니다. 위해서 기도해주셨던 분들. 특히 귀한 시간과 노력으로 조문객을 맞아준 교회식구들,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나의 마음으로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당신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습니다. 사랑합니다!

 

 

(2005/05/08)
아버지의 상태는 육체적 컨디션은 괜찮은 편이지만 정신적 컨디션은 매우 안 좋으시다.
나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신다.
한달 전에 그걸 확인하고 마구 울었었는데...이젠 그것을 받아들인 상태다.
주무시고 계실 때가 더 행복하실 것 같다.
나를 못 알아보시면서도 내 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서로 응시할 때 어떤 교감이 이루어지는지
나는 모르겠다.
할만큼 했다는 주위의 소리가 위안이 되지 못한다.
아직은 아직은
의식이 온전할 때 나누던 대화를 할 수 있는 순간이 돌아오기를 기도할 뿐이다.
어버이날인데
아무 것도 챙겨드리지 못했다.
누나가 예전에 어버이날 선물로 사다들인 T셔츠가 아직도 상표가 부착된 대로 서랍 속에 있는데..

 

 


(2005/03/04)
오늘 부산의료원으로 옮겼다. 부산의료원은 부산대 출신이 많아 일단 입원하기는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남자병실이 적어서 많이 기다렸다. 바쁜 시즌에 걸리면 신경쓰기도 힘들었는데 오늘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달려가 이원절차를 밟았다. 퇴원수속 밟고 다시 입원수속 밟은 절차는 간단한데 신경도 쓰이고 시간도 걸려서 이런 날은 파김치가 된다.
아버지는 환경의 변화에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곧 평온해지셨다. 개인병원에 있을 때 옆 침대에 있던 총각이 같은 병실에 있어서 참 세상 좁다는 것을 실감한다. 거의 1년 8개월만의 해후인데, 그새 아버지는 더 안 좋아지신 것을 비교케 된다.
이 곳 의사 샘은 인상도 좋고 일단 환자를 대하는 자세가 맘에 든다. 같은 병실 환자도 칭찬하고...
믿을 수 있는 의사를 만나는 것도 참 복인데...
이 곳에서 더 나빠지지 않으시고 맑은 공기에 봄바람도 쇠며 지내시면 좋겠다.

 

 

 

 

 

 




(2004/12/06)
아버지는 오늘 부산대병원으로 옮기셨다. 출근했는데 전화가 왔다. 한달전에 예약했었기에 내일로 미룰 수 없었다. 내일 병실이 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일정을 취소하고 퇴원수속 및 입원수속을 위해 부산으로 달려와야 했다.
지난 번에도 힘이 되어준 친구가 또 도와줬다. 역시 친구가 있어 맘이 편하다.
이 곳에서 PEG 수술을 다시 받고 건강상태를 확인점검하게 될텐데
적어도 두달은 있었으면 좋겠다.

 

 

 

 

 

 


(2004/11/04)
대학시절에 썼던 글이 있다. 제목은 "이빨이론". 친절하게 난 영어로 The Teeth Theory 라는 부제를 붙여서 교회 회지에 기고했었다. (그 회지 못 찾아서 원문을 올릴 수 없는 게 유감이다^^)

"이빨이론"은 내가 만든 검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그냥 대학 다니며 는 게 말이라고 할까.
7년 선배들과 기숙사에서 같이 살다보니 또래보다 훨씬 많은 세상물정을 알게 되고 그들과 얘기하다 보니 말이 많아진 게 사실이다.
속설로 "이빨 푼다"고 하는데 그냥 의미없는 말장난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아마 그에 관련된 글을 쓴 것 같다.
의미없는 "이빨풀기"만을 하지 말자는 주제로 말이다.

갑자기 웬 이빨?
할 사람이 있겠다.


늦게 퇴근해 아버지한테 들렀다.
매일 특별한 일이 없는데..오늘은 간병인 아줌마가 좀전에 일어난 일을 얘기해주신다.
앞니 세개가 부러졌다고.
10개월동안 씹어본 역사가 없지만 가래를 뽑기 위해 입으로 튜브를 넣을 때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그래서 튜브를 씹기 때문에 딱딱한 구멍뚤린 기구를 입에 물린 후 그 구멍으로 목젖까지 튜브를 넣어 가래를 뽑곤 한다.
그런데 본능적인 저항은 그 딱딱한 기구를 물어 뜯어버릴 만큼 강하다. 몇주를 쓸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무시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빨이 감당할 수 없었나보다.

그런데 보여주신 이빨은 생이빨이 아니다.
보철하신 흔적이 있는 이빨이다.
평소에 아버지 이빨에 보철을 한 느낌이 들었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에선 치과에 가신 적이 없기에 어느 적에 하신 것인지 모르겠다.
누나에게 답답해서 전화해보니 누나도 기억 못한다.

부러진 앞니 아래쪽 세개가 세트로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아버지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아파하시지는 않으시지만 바람이 숭숭 들어갈 것 같은 입모양을 보니
오늘은 더 맘이 쓰리다.
아버지가 계속해서 고통을 겪으시며 생의 종착역을 향하는 것이 한층 안스럽다.

먹기 위해 살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하셨던 분이신데...
난 오늘도 먹고 살기 위해 그렇게 부지런을 떨었던 것은 아닌가.

오늘

아버지의 이를 한번 일부러라도 보기 바란다.

혹시

상한 이라도 있다면

치과에 가보도록 권유하세요.

 

 

 

(2004/09/16)
24일만에 다시 보훈병원으로 옮겼다. 벌써 9번째 병원이동이다. 이젠 정말 그만 옮겨다니고 싶다. 그러나 또 겨울이 오기 전에 부산대병원에 들어갔다 와야 한다. PEG시술한 튜브를 새로 바꿔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2차병원과 3차병원을 왔다갔다해야 할 것 같다..

 

 

 

 

 




(2004/08/23)
오늘 4개월간의 보훈병원생활을 끝내고 동아대병원으로 옮겼다. 부산에서는 가장 깨끗한 병원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탁트인 창밖으로는 구덕운동장이 내려다 보인다.
몇시간 머물지 않았지만 담당간호사나 레지던트도 친절하다. 이곳에서도 몇주간 있지 못하지만 있는 동안 검사도 하고 안정을 취하면 좋겠다.
감사하게도 왼쪽 발가락 상처는 많이 좋아졌다. 발톱도 자라고 있고..정말 다행이다..

 

 

 

 

(2004/06/28)
아버지가 받고 있는 물리치료장비.
다리를 조여줬다 풀어줬다하는 기계장비다.

(2004/06/18)
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리고 계신다. 습한 날씨에다 새로 입원한 환자들의 상태와 보호자들의 스트레스를 지켜보고 들으셔서 그런걸까? 기분이 별로시다. 그런 모습을 뵙고 돌아오면 내 기분 역시 처진다. 19년전 아버지로부터 받은 첫 편지를 읽어보았다. 나에 대한 걱정과 함께 내가 떠난 빈자리로 인해 외로우셨던 아버지의 지난 시간이 머릿속을 스친다. 나는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호칭 "아빠"를 말미에 쓰신 1985.11.20.자 편지를 읽으니 눈물이 핑돈다.




(2004/05/01)
Congratulations! It's my father's 83rd birthday.
오늘은 아버지의 83번째 생신이다.
건강하셨더라면...하는 생각은 뵐 때마다 머리 속에 그려지는 소망이다.
..했었더라면..
과거에 대한 후회가 배어 있는 이 접미어는 가급적 하지 않아야 하는 표현이지만...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은 무엇을 말하고 계신 걸까?
뜨거워진 베개를 뒤집어드리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느낌이 그려진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는 것은
아주 쉬운 당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     

  

 


(2004/04/27)
아버지는 일주일전 보훈병원으로 옮겨와 재활치료중이시다. 보훈병원의 물리치료사는 참 친절하다. 그리고 구비된 시설--물리치료실만--도 아버지한테는 퍽 만족스럽다. 지난 날이 후회스러운 것은 수술한 이후 이 병원으로 옮겨왔더라면 하는 생각에서다. 좀더 병원정보에 민감했었어야 했는데...작년에 이어 이번 주말 두 번째로 병상에서 생일을 치르실 아버지를 생각하니...맘이 좀 그렇다...

 

 

 


(2004/02/26)
아버지의 마음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새장에 갇힌 새는 날아가고 싶어하고 기둥에 줄이 매인 강아지는 자유롭게 뛰쳐나가고 싶어한다.
병상에 누워서 아들이 오는 시간만을 기다리시는 아버지도 같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새장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나였는데 말이다.
아버지께 숙제를 드렸다.
아버지 저 잘하고 있다고 아버지 입술로 직접 말씀해주실 수 있도록 건강해지세요.
맛있는 음식 먹을 수 있도록 건강해지세요.

 

 

 

(2004/02/08)
아래 글을 쓴 걸 보니 약4개월이 흘러갔다. 아버지는 두달 넘게 부산대학병원에서 재활훈련을 받고 계시다. 언어치료가 가능한 정도까지 회복되었으나 12월말 폐렴이 생겼다. 뇌경색후유증으로 기도의 개폐가 원할치 못해 음식물이 기도로 들어가다보니 생긴 결과다. 항생제투여로 진정이 되었으나 PEG수술을 받아야 했다. (PEG수술은 내시경을 통해 위에 구멍을 뚫어 곧장 음식물을 투입할 수 있는 관을 배꼽위에 꼽는 내과적수술이다). 즉 더이상 입으로는 먹는 것을 포기해야했다. 그러나 시술후 20여일만의 검사에서 물이 아니면 넘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의사의 소견상 요플레 정도는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기도로 넘어갈 가능성이 많아 주식은 여전히 배로 직접 투입하고 맛만 보게 하는 수준으로 계속 살아야 하신다. 오늘도 입으로 먹고 싶어하는 의사를 표시하는 아버지를 뵙는 우리 가족의 마음은 편치 못하다.
병원에서의 장기간 입원이 곤란한 우리 나라 의료계의 현실을 알면서도 당분간 옮기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아래 글에 표현된 지난 과오들을 다시 범하고 싶지 않아서다.
이제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지 않은 나이가 되었고 내가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거리낄 것이 없는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요즘 활용하고 있다. 바쁜 시즌 동안은 병원이동문제로 신경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또 내 앞에서 사정사정하는 의사를 보면 맘이 여려질 지도 모르겠다...휴...
주님! 도우소서^^

 

(2003/10/18)
누구보다 건강하셨던 아버지랑 함께 보낸 시간이 적었다. 젊은 나이 내가 추구하는 영역에 몰두하다 보니 혼자 늙어가시는 아버지를 좀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지 못했다. 가끔씩 아버지를 모시고 드라이브를 하면 참 좋아하셨는데..겨우 경주나 서울에만 한두 번 다녀왔던 기억이 난다. 내가 쓸데없이 투자했던 시간들을 줄이고 아버지랑 단둘이서 전국여행이나 일본여행을 시도했었더라면 노년에 그나마 잠깐의 재미라도 드렸을텐데...
건강할 때 아버지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지 못한 사실이 오늘도 이 글을 적으며 안타까울 뿐이다.
일찍 홀로 되신 아버지의 마음을 좀더 이해해드렸어야 했었는데....

1996.9. 뇌졸중(우뇌) 투병시작..침례병원(신경외과의사는 MRI사진보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지나고 보니 황당 그 자체다)-고신의료원(신경과 친구의 강권으로 옮겼다 그리고 두달만에 걸어다니시고 재활하기 시작했다)
1996.12.퇴원 집에서 재활훈련계속. 마비된 부분은 없고 혼자서 걸어다닐 수 있는 상태가 됨.
~ 2000.8. 당뇨수치가 높아 혈당관리. 매월 신경과 외에 내분비내과에서 처방받아 투약중.
2000.9. "우유"사 가지고 오다가 넘어져서 무릎부상. 영도병원 입원. 무릎에 고인 피 뽑고 일주일입원 후 퇴원.
2001.9. 침대에서 일어나다 넘어져 엉덩이부분 다침 영도병원-부민병원-한솔병원
2002.1. 퇴원 조심조심 걸으며 집안에서만 생활.
2002.9. 화장실 가다 넘어져 고관절 골절 고신의료원 입원.
2002.10. 고관절수술(인공관절 넣지 않고 고전적수술시행..의사는 몸상태를 걱정해 한 수술이었으나 의사 자신도 후회함)
2002.11. 3차의료기관 장기입원 곤란해 동인병원으로 이원(뼈가 붙기전에는 물리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뼈 붙기를 기다리는 형편이었음. 그리고 그 결과 무릎이 구부러져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상태가 됨.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었음. 병원간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하는 생각이..)
2003.2. 뼈가 겨우 붙어 물리치료를 위해 한솔병원으로 이원.(무릎펴는데 시간 다보냄. 결국 펴지지도 못함)
2003.6. 기억장애발생(전두엽을 1cm가량 덮고 있는 물. 신경외과의견으로는 급성인지 만성인지 확인하기 힘들어 투약으로만 치료하기로. 투약을 통해 어느 정도 기억회복.)
2003.8. 경미한 뇌졸중(좌뇌)발생. 오른손마비 실어증
2003.9. 침상에서 자세바꾸는 중 수술한 고관절부위쪽 골절발생. 고신의료원 재입원.
2003.10. 검사결과 대단히 위험해 수술포기..입원중

 

 (2003/04/14)
어쩜 우린 매일이 새로울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오늘 떠오른 태양은 결코 어제의 태양과 같은 위치에 있더라하더라도 다른 날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버지는 82번째 생신을 병원 침대에서 맞이하셨다. 겨울을 병원에서 지내신 것도 처음이고, 파릇파릇한 봄내음도 병원에서 맞이하고 계시기 때문에 기분이 그리 좋으실 리 없으실텐데도 난 또 여쭙는다.
기모찌 도-데스까...(기분 어때요?)
이이데스...(좋아..)
누나는 아직 100일도 안 된 아기 때문에 내려오지 못했지만 어제 매형과 조카들이 찾아왔단다. 떡이랑 과일을 싸들고서....병상에서 맞는 생신이 처음이신지라 나도 오늘 무엇을 가지고 갈까 고민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아득한 옛날이 되었나 벌써. 가족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 다니면서 처음 맞은 아버지의 생신때 마침 난 동전을 잔뜩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공중전화를 찾았다. 그 공중전화박스가 과연 지금도 있을까 모르겠다. 이대 기숙사 공중전화였는데 그날 난 교회 조장누나랑 조모임을 하고난 후 늦은 저녁이었지만 전화하기 위해 금남의 집이었던 이대캠퍼스를 합법적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아버지께 전화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을 해드릴 수 없는 내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불효자인 것 같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있어야 할 지 모르는 아버지의 병원생활 그리고 나의 고정되지 못한 생활....
아버지.....죄송합니다.

예전에 썼던 아버지에 관한 글 중에 소개된 바 있는 오산학교 교가를 오산중학교 사이트에서 찾았다. 오랜만에 들어보니 참 감회가 새롭다.

오산학교교가 듣기

 



 

(2003/02/22)
5개월째 병상에 계신 아버지에게 갈 때는 신문을 들고 간다. 한 10분 정도 훑어보는 정도지만 사회가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읽고 계신다. 저 좁은 침상에서 지내는 24시간이 얼마나 답답한 지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빨리 회복되어 함께 생활해야 하는데....저 침상에서 내려와 걸으셔야 하는데... 이제 겨우 뼈가 붙어 본격적인 물리치료를 위해 다른 병원으로 옮기려 한다.
생각나시면 기도해주기 바란다.

 

(2002/11/20)
아버지는 현재 넘어져 부러진 다리때문에 수술후 입원중이시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쓴 일기다.

11/20  아버지의 수첩
아버지는 발병하시기 전까지 매일매일의 기록을 남기신 분이다.
아버지의 서류함을 정리하다가 수첩을 보게 되었다.
1996년 9월 5일에 중풍이 생긴 날인데 그 전 며칠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진우집 청소"
내가 독립해 살던 아파트를 청소하러 아버지는 몇 차례 와주셨던 것이다.
그 전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진우 복통"
매일매일의 짧은 기록이 담긴 그 수첩을 보며 다시 한번 아버지의 사랑을 되새긴다.

 

 

(2000/04/17)
오늘(2000/04/17)은 아버지의 79번째 생신이다. 1922년생. 평북 희천 출생. 오산고 졸업. 실향민. 아버지에 대해서 무엇부터 써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은 중풍을 앓고 나서 예전처럼 거리를 활보하며 다닐 수 없고 또 당뇨병 증세도 있어 하루에 10번씩이나 약을 먹고 계시지만 신선동에서나 부산 부둣가에서 아버지를 모르면 간첩이었을 만큼 유명(?)하신 분이셨다. 민족 비극의 전쟁 6.25동란이후 월남하신 아버지는 통일이 되어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안고 결혼도 안 하시고 40이 넘게 혼자 사셨다. 어머니와의 중매를 서셨던 이모님은 신선동 지금 다니는 우리 교회 근처에 방 한칸, 숟가락 담긴 냄비 하나 놓고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성실성을 높이 평가하셨다고 한다.

함께 월남한 동향 친구들은 하나 둘 색시를 얻게 해 신방을 차려주시면서도 자신은 통일이 되어 두고 온 가족과 상봉하기를 십 여 년 기다리셨던 아버지. 일해서 번 돈을 남을 위해 쓰셨던 아버지. 친구에게 돈을 절대 빌려주지 말고 정 빌려줄 처지라면 받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주어라고 가르치신 아버지. 술을 즐겨 드셔서 늘 저녁 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셨던 아버지. 그러면서도 저녁은 꼭 집에서 먹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어머니가 차려 놓은 밥그릇을 비우셨던 아버지. 들어오실 때 건빵이나 섬베이 과자 한 봉지 사오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던 아버지. 아이들을 좋아해서 여름 날 쉬실 때면 동네 꼬마들 다 데리고 앞바다에 가서 담치랑 게랑 물고기들을 잡아주셨던 아버지. 그 때 아버지를 따라 다녔던 꼬맹이들이 벌써 아들 딸을 낳아 그들이 대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있다. (그동안 나는 뭐했노)

11년 연하이신 어머니는 아버지를 어려워하셨다. 세상에 대해 불만이 많으셨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주정하시면 나를 업고 집 밖에서 우시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당시엔 대단한 학력의 소유자셨고 어머니는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했기에 아마 대화가 잘 안 되었으리란 것은 쉽게 상상이 간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셨다. 어머니가 병에 걸려 입원했을 때 아버지는 밤엔 병실을 지키시고 낮엔 일하셔야 하셨는데 병원에 가보지도 못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 계신 집에 누나, 동생이랑 있어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조만식 선생이 교장을 하셨고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하신 "오산학교"에 서 공부하셨다. 해방 후 오산학교 출신들은 우리 나라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 있었고 월남하신 아버지는 국회의원의 비서실에서 잠시 근무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이 사회에 대해 혐오하셨고 부산으로 내려와 부두에서 하역작업에 종사하게 된 것이었다.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시고 원칙을 고수하시는 바람에 사회에서는 "성공"과는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고 30년 직장을 정년퇴직하실 때도 쥐꼬리만한 퇴직금을 손에 쥐셔야 했고 그것도 어머니 치료비에 몽땅 쏟아 부을 수밖에 없으셨다. 정직하면 손해보는 세상을 사신 아버지. 그래서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하루에 수 만원씩하는 알부민 주사를 맞아야 하실 때 퇴직하며 제출해야 하는 의료보험증을 사용할 수 있기 위해 의료보험조합 직원에게 인사치레한 그 어쩔 수 없었던 한가지 오점을 마음 아파하셨던 아버지셨다. (그래서 난 "철도원"을 보고 아버지를 생각했다)

내가 기억하는 시간으로 예닐곱살 되었을 때부터 아버지는 매일 아침 바다에 나가 운동을 하셨다. 새벽 동트기 전에 집을 나서서 집에서 1Km떨어진 함지골에 가 준비운동을 하시고 겨울, 여름을 가리지 않고 차가운 바다에서 수영을 하시고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으시고 출근하셨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보조기를 신고 걸음마 연습을 할 때 아버지는 3평도 안되는 방이지만 아침 운동하시는 시간 동안 내가 수십 바퀴 방안을 돌도록 운동을 시키셨고 누나랑 동생은 아버지가 운동하는 곳까지 와서 아버지가 수영하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소리 질러 여기 다녀갔음을 확인케 하셨다. 방학 때는 나에게도 그걸 요구하셔서 그 아침에 왕복2Km의 거리를 걷게 하셨다.

아버지는 운동하고 돌아오실 때 나와 함께 걸으며 노래를 부르셨다. "네 눈이 밝구나 엑스 빛 같다. 하늘을 꿰뚫고 땅을 들추어 온가지 진리를 캐고 말련다. 네가 참 다섯 뫼의 아해-아들-로구나"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이 노래는 아버지가 다녔던 오산학교의 교가였다. 하도 많이 부르셨기에 내 뇌리에 기억된 이 노래. 그래서 대학생이 되어 만난 오산 고등학교 출신 과친구--6.25이후 오산 학교는 서울로 내려왔다.--는  내가 그 학교 교가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부르자 무척이나 황당해 했었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담배를 즐기셨던 아버지는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솔"이 나오면서 인상된 담배값에 항의하시며 금연을 선포하셨고 부두에서 일하실 때 선물로 받은 양담배--당시는 양담배가 수입 금지 품목이었기에 시중에선 꽤 인기있는 품목이었다.--를 주위 분들에게 나눠주시고 그 담배겉봉지로 스크랩한 책이 3권이나 될 정도의 담배애호가로서의 삶을 단번에 금하셨던 대단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지금 매우 허약하시다. 술 때문에 앓게 된 중풍. 어떤 의사는 포기하라고 했고 담당의사였던 내 친구도 왼쪽 팔은 포기하라고 했었는데 지금 아버지는 약하실 뿐 팔다리 모두 괜찮으시다. 운동을 아무리 많이 해도 병을 막을 수는 없지만 운동으로 단련된 몸은 병에 걸렸어도 회복되는 속도가 무척 빠른 것을 동네에서 흔히 보는 3,40대 중풍환자들이 아버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딘 것을 보며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해도 인생에는 정해진 나이가 있다. 79이라는 나이는 속일 수 없는 세포조직의 노화가 아닌가. 얼마 전에 괜히 열받았던 순풍산부인과의 오지명이 상상한 노년의 오지명의 모습이나, 엊그제 본 "매그놀리아"에서 톰 크루즈의 아버지로 나온 병든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결국 인생이란 백년 이백년 지속될 수 없는 유한의 삶이다. 기독교를 반대하지는 않으시지만 정작 믿음을 거부하시는 아버지가 내가 만난 하나님을, 어머니가 만나셨던 하나님을, 우리 온 가족이 믿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지만 그 풀리지 않는 숙제를 남겨두고 저물어 가고 계시다.  

아버지. 너무 나이가 많으셔서 친구들이 흔히 불렀던 "아빠"란 호칭을 한번도 부를 수 없었던 아버지. 지금 제 몸도 부실한 아들과 살아가는 그 마음을 내가 얼마나 알 수 있겠는가만, 아버지는 아버지다. 나와 신앙이 달라도 아버지다. 나를 낳으셨고 나를 기르셨고 나를 가르치셨던 바로 그 아버지시다.

아버지! 오래 사세요. 손주 안겨드릴 수 있게 오래 사세요. 그리고 반드시 주님을 영접하리라 믿어요. 기도하거든요. 저도 누나도 동생도 이모님도 그리고 하늘 나라 계신 어머니도....